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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0TRvqfOiBw

 

뿐만 아니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이라는 고립된

타인, 그리고 세상이라는 육지를 잇는

가교이기도 하다.

즉,

글쓰기는  

단지 내적 소통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소통의 매개로 작용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의사소통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자,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시하는 능력이다.  

대부분의 의사결정 과정이      

문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글쓰기가 소통의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그럼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요.  

소통이 인간사의 기본이고,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가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겠어요.

의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정당한 소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염원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는

어려울테니까요. 

또, 글쓰기소통의 과정에서 

크게 기여를 한다는 것도 인정해요.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하루하루 힘겨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고요.

당신이 말하는 소통이, 글쓰기

밥 먹여 주는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낭만적인 연애의 크루즈 여행이 끝나면 

결혼이라는 일상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글 쓰는 사람

결코 생계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걸. 

 

그런데,

사실 소통은, 그리고 글쓰기

당신이 말하는 밥벌이,

생계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좀 더 상세하게 알아보자.

 

당신과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때,

자본이란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형태의 부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돈이나 토지, 건물이나 장비 등과 같은     

유형자본이 중시되었던 반면,

현재는 오히려

창의성, 혁신, 브랜드 이름, 평판,

지적 능력, 전자자본, 네트워킹 등의

무형자본이 훨씬 더 중시되고 있다.

 

왜 그럴까?

창조 경제에서는

무형자본유형자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탓이다.  

 

2000년 8월,

『비즈니스 위크』 지는

창조 경제 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내가 아는 한 말이다.)

이듬 해인 2001년,

존 호킨스(John Howkins)

그의 저서 『창조 경제(The Creative Economy)에서

15개의 창조 산업분야를 망라해

창조 경제를 규정하고,

그것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기술했다. 

그가 말한 창조 산업 분야란 

소프트웨어, 연구개발, 디자인, 그리고 영화와 음악 같은

창조적 콘텐츠 산업 등을 의미한다. 

 

창조 산업

특허, 판권, 상표, 디자인 등의 지적 재산을 생산하는데,

존 호킨스가 전 세계에 걸쳐

창조 분야 15개의 연간 시장 규모를 추산할 결과, 

그 규모는 자그마치  2 2,400억 달러에 달했다.

 

한편, 

리처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

2002년, 그의 저서 『신창조 계급』에서 

창조 경제산업 분야가 아니라 

직업의 관점에서 규정했다.

그는 이 책에서 

창조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정체성을 획득하고 있는 집단을

창조 계급이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이 새로운 계급을 정의하는 근거 역시

경제였다.

 

리처드 플로리다

창조 계급의 독특한 특징을 

의미 있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데서 발견했고, 

핵심 집단인

순수 창조의 핵(Super-Creative Core)

그 이외의 집단인   

창조적 전문가들(Creative Professionals)

두 가지 집단으로 구성된다고 규정했다.

 

 그는 먼저,

순수 창조의 핵(Super-Creative Core)

해당하는 직업에는

과학자와 엔지니어,

대학교수, 연구원, 분석가,

디자이너, 건축가, 예술가,

시인, 소설가,

논픽션 작가, 편집자, 논평가,

기타 문화계 종사자 등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아낼 것을 요구받기도 하고,

이런 일을 완수해서 돈을 번다. 

 

또 하나의 창조 계급인

창조적 전문가들(Creative Professionals)

하이테크 업종, 금융 서비스,

법률, 보건의료, 경영 분야 등

광범위한 지식집약형 산업에 종사한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복잡한 지식 체계에 의존해서

특정한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한다.         

이 집단이

고학력자나 수준 높은 인적 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창조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호기심과 독창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서 

의미 있는 새로운 양식창조하는 일에 종사한다.

리처드 플로리다

바로 여기에

다른 계급들과는 다른 

창조 계급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지식이나 미술, 글쓰기와 같은 

창조 자본을 사용해서 창조적인 일에 종사한다.

 

미술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창조 자본 가운데 하나인 글쓰기

당신이 걱정하고 있는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지금부터는

창조 자본인 글쓰기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조금 더 고상하게 얘기하자면

경제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도록 하자.

 

문학은 재미일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이기도 하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미국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 1899~1977)

문학을 단지

유희의 수단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중요한 도구로 인식했다.

 

그의 말대로, 

글쓰기생계를 유지하는 가장 대표적인 직업은

역시나 문학 등의 예술 글쓰기를 하는 

작가 집단일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글을 쓰는 작가

오로지 순수하게 창작에만 몰두해야지,    

결코 을 바라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글쓰기를 통해 돈을 버는 것

마치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는

비열하고 저속한 행위라도 되는 양

폄훼하기도 한다.

 

그들은 왜 한결같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이유는 단순하다. 

예술은 순수해야지,

결코 상업적이어서는 안된다는 편견 때문이다.

한마디로,

상업예술은 예술이 아니고 

오로지 순수예술만 예술이라는 논리다.

 

그래서,

그들은 

문학을, 글쓰기

으로 환산하는 행위를 천박하게 여기고,   

글 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아니라,

가장 숭고한 예술적 가치

자유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규정해 버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한, 

『성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성서』에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6 10절) 

고 가르친다.

또,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신명기」 8장 3절) 

고 가르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많은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소명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러시아의 시인

푸슈킨

(Alexander Sergeyevich Pushkin,1799~1837)

한때 

「시인과 군중」이라는 시에서

예술의 고귀한 가치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오로지

생존 경쟁에만 몰두하는 군중들을 향해

준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우매한 군중아, 입을 다물라.

먹고사는 데만 급급한 품팔이 노예들아!

너희의 뻔뻔한 불평 참을 수 없다.

너희는 땅 위의 버러지들,

천상의 아들이 아니어서

만사를 그저 손익으로 따져

올림푸스 산정의 조각상도 근으로 평가하니

그 안에 담긴 이익 보지도 못하는구나(…)

 

1936년,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1899~1961)도      

맥스웰 퍼킨스에게 보내는

서간 선집Selected Letters(p.438)에서 

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작업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상업적이지 않은 정직한 작업말입니다.

글을 한 번에 한 문단씩 차근차근 써내려 가는 거지요.

하지만

그는(피츠제럴드)

한 문단으로 얼마나 벌 수 있는지를 계산했어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숭고한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또 자유를 위해 글을 쓴다는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다. 

또,   

할 수만 있다면   

돈으로부터 어떤 구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물론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런 행운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영국의 예술비평가이자 사회개혁자로 알려진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좋은 예다.

 

그의 아버지

런던에서 포도주 사업을 해서 부를 일궜다.   

덕분에,

러스킨

경제적으로 윤택한 환경에서

17이라는 긴 시간동안

방대한 자료를 연구하는데만 매진할 수 있었고,

마침내 

『근대 화가론』(총5권)이라는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평론가

필립 길버트 해머튼    

(Philip Gibert Hamerton, 1834~1894)은 

이런 존 러스킨을 두고,  

부가 만들어낸 천재 작가라고 평가했다. 

 

해머튼의 말대로,

존 러스킨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건 분명해보이지만,    

그의 아버지

오랫동안 그의 집필 활동을 후원해주지 않았다면,

또 그가 빈곤한 환경에서 글을 써야만 했다면,

아마도

그런 위대한 작품을 완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 (Karl Mark, 1818~1883)

그의 열성적인 동지이자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물질적 지원을 해준 덕분에   

『자본론』 1을 탈고할 수 있었다.   

엥겔스가 후원자 역할을 자청함으로써 

마르크스

글쓰기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마찬가지다.  

그는 유복한 지주계급 출신이어서,

돈 문제로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이

대표작인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 라는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작가들은 

글쓰기에 몰두할 때 

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탁! 탁! 탁!  

자. 이제 당신과 나 모두

다시 현실로 돌아올 차례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어떤가?

사실, 꽤 그럴싸하게 들린다. 

 

우리의 일상을 둘러보면 

정치인의 비자금 문제나  

유산 상속을 둘러싼 다툼,

그리고,  

이혼후 위자료 분할 문제 등 

유독 

돈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빈번한 탓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이에 대해, 

19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1856~1950)

 

돈의 부재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다.”

(Lack of money is the root of all evil.)”

라며 

성서』의 내용과는

다소 상반되는 주장을 펼쳤다.              

 

비록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

(Victor-Marie Hugo,1802~1885)

장편소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에서 만들어낸

장발장(Jean Val Jean)

버나드 쇼의 주장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의 전형이다. 

 

장발장은 가난했다. 

굶주림에 시달렸고,

견디다 못해 빵 한 조각을 훔쳤고, 

그래서 

오랜 기간 감옥살이를 했다.

 

현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먹고사는 문제로 죄를 짓는  

생계형 범죄가 증가하는 추세다.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지 못해서 

물건을 훔치는 청소년과 대학생,

부모님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강도짓을 하는 가장이 그 좋은 예다.                                                 

 

자.

정리해보자.

과연 

돈을 사랑하는 것모든 악의 뿌리일까?

아니면,

돈의 부재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인걸까?

 

실제로는

돈은 단지 

교환 가치를 제공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는 결코 선도 악도 아니다.

 

사음수성독 우음수성유

(蛇飮水成毒 牛飮水成乳)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드는 것처럼

선과 악을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그 돈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비유하자면,

자동차에 해당한다면 

사람은 운전대를 잡고 

그 자동차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운전수에 해당한다. 

 

사람이 운전석에서

핸들을 어떤 방향으로 조종하느냐에 따라서                     

자동차가 움직이는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이 말은 또 어떤가?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그 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욕구인

정신적 욕구를 추구한다는 의미이지,

결코 빵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빵이 없으면 

목숨조차 부지할 수 없는 게

바로 우리 인간이다.

 

또,

상업적이지 않은 정직한 작업

중요하다고 말한

푸슈킨헤밍웨이의 말도  

일견 수긍이 간다. 

그들의 말대로,

상업성만을 전면에 내세워 

글쓰기의 예술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면 

그건 분명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일한 논리로,

예술성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겨

상업성이 필요한 현실을

경시하고 외면하는 것 또한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작가들은 

글쓰기에 몰두할 때,

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영국 작가

서머싯 몸

(William Somerset Maugham,1874~1965)은 

『인간의 굴레』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돈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멸감밖에 못느낍니다.(…)

저는 작가건 화가건 먹고살기 위해

오로지 자기 예술에만 의존해야 하는

예술가들을 진심으로 동정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여전히

진정한 작가라면

돈을 받지 않고   

단지 글쓰기에 대한 사랑만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예술에도 은 필요하다.

돈을 벌 수 없다면

작가는 지속적으로 글을 쓸 수 없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거나 애써 외면하다가는

얼마 안 가서

펜을 내려놓게 되는 건 물론이고, 

어쩌면 글쓰기를 그만두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이자 블로거

제프 고인스 (Jeff Goins, 1982~)도 

『이제, 글쓰기』에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사업가가 되는 것이고,

작가로 성공하려면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작가가 되려는 사람이나

책을 출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플랫폼이나 마케팅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스스로 마케터판매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글쓰기 '예술'일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예술가는 절대로 굶어 죽지 않는다』에서

예술가는 일을 할 때 

언제나 대가를 받고 일해야 한다는 

가치의 원칙을 역설하기도 했다.

 

제프 고인스는  

이 책에서

예술가를 

굶어 죽는 예술가잘나가는 예술가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굶어 죽는 예술가들은 대개 공짜로 일한다.

이 자체로는 전혀 나쁠 게 없다.  

문제는

이런 유형의 예술가들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현실의 벽에 부딪치게 되면 

창작을 그만둘 위험성도 더 높다는 데 있다.   

그래서,

제프 고인스는

무료로 일하는 버릇을 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반면,

잘나가는 예술가는 언제나 대가를 받고 일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작품이

돈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그 가치만큼 돈을 청구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작가가 가져야 할 예술성만큼이나

사업성을 중시하는 걸까?

없이는 을 더 오래 쓸 수 없다는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더 많은 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위대한 작가들 가운데 몇몇은

지고의 명예를 위해 글을 쓰기보다는 

작가의 삶에서 이 수행하는 역할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을 벌기 위해 을 쓰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러시아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Fy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다.  

언제나 돈이 부족했던,

그래서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러나 명민했던 이 작가는  

문학도 결국 비즈니스 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는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문학으로 돈을 벌 결심을 했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벌기 위해 펜을 들었다.

생계를 위해, 빚을 갚기 위해,

단 한 푼의 원고료라도 더 받아야 했던 그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돈을 받기 위해서,  

몸이 아파도,

또 어떤 때는 발작이 일어난 다음 날에도

글을 써야만 했다.

 

나는 노동하는 작가다 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집필하는 작가라기보다는 

오히려 노동하는 작가에 더 가까웠다.

그는 높은 원고료를 받기 위해,

많은 인세 수입을 올리기 위해 

잘 팔리는 소설을 써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잘 팔리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 하던 도스토예프스키

마침내 하나의 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바로 독자 의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주위 사람들이 너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들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어라.

잘못은 너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중의 취향을 파악해서 

일반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내어 놓기만 한다면 

책은 분명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신문 기사를 탐독하면서 

독자들의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고,

그 결과   

그가 쓴 소설이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려면 

소설에

통속적인 요소와 멜로드라마적인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전문적이고 고상하기보다는

적당히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또 연애를 주제로 한 

감상적인 대중극의 성격을 띤 소설이라야

비로소 대중의 이목을 끌고,

그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덕분에,

독자의 취향을 잘 파악해서 쓴 그의 소설은

당대 러시아 작가들 가운데 가장 많이 판매되었다.

(하지만,

생계를 꾸리고 빚을 청산하기 위해

인세를 먼저 받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그의 명성에 걸맞는 돈을 받지는 못했고,

평생 가난을 면치는 못했지만 말이다.)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

(Francis Scott Key Fitzgerald,1896~1940)

을 벌기 위해 을 썼다.

 

1914,

피츠제럴드는 세인트폴에서 

일리노이주 레이크포리스트 출신의 

16세 소녀 지니브러 킹을 만났다.

하지만,

피츠제럴드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를 거절했고, 

급기야 1917에는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해버렸다.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고,

어쩌면,

피츠제럴드

글쓰기을 벌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피츠제럴드

미 보병대의 소위로 임관하고 나서 

『낭만적인 에고이스트Romantic Egoist

집필하기 시작했다.

1년 후인 1918,

그는 앨라배마주 대법원 판사의 딸인

젤다 세이어를 만났다.  

같은 해에 피츠제럴드는

『낭만적인 에고이스트』 탈고를 마친 후,

스크리브너스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지만   

출간 거절 통보를 받았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피츠제럴드는 군대에서 전역한 후

뉴욕 맨해튼으로 건너간다.  

그는 비록 신문사에 취직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광고 회사인 배런 콜리어에 입사해 

주급 35달러를 받으면서 전차 광고를 제작하게 된다.

피츠제럴드는 여전히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밤마다 돈이 될만한 것이라면

그게 소설이든, 시든, 동화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썼다.

 

그는 19개의 이야기를 써서 출판사에 보냈지만,

돌아온 것이라곤 122통의 거절 편지밖에 없었다.

피츠제럴드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해 보였고,

작가로서 성공하는 것도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젤다 세이어가 그런 피츠제럴드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

『낭만적인 에고이스트』를 개작하는 데 몰두했고,

그 결과   

스크리브너스 출판사는

그의 작품을 출간하겠다고 결정한다.

 

피츠제럴드젤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첫 번째 소설인

『낙원의 이쪽This Side of Paradise이  

스크라이브너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젤다는 마침내 결혼을 승낙했다.

출간된 책은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뒀고,

피츠제럴드는 젤다와 결혼하게 되었다. 

 

피츠제럴드는 이후 4년 동안

장편 소설 한 편과 단편 소설 몇 편을 펴냈는데,

문학적인 면에서나 상업적인 면에서

모두 성공하게 된다. 

이후, 그는 단편 소설 하나를 쓸 때마다

2천 달러를 받았고,

1년에 50만 달러에 달하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된다.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

(Charles John Huffam Dickens,1812~1870)도  

을 벌기 위해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미국 여류 소설가

다니엘 스틸

(Danielle Fernandes Dominique Schuelein-Steel)

(1947~)은 

전 세계적으로 8억부 이상의 소설을 판매해 

현존하는 작가 중 가장 많은 책을 판매한 작가이자,

출판 역사를 통틀어서도

책 판매량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작가다.  

 

그런 그녀도 생계를 위해 을 썼다.

그녀는 한 때 이런 말을 했다.

 

내게 글쓰기는 직업이고 삶의 길이다.

글쓰기는 예술적인 유희가 아니다.”

실제로 

그녀는 매일 아침 9시에 책상에 앉아서

펜과 노트를 들고 몇 시간 동안 

글감을 찾기 위해 일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글쓰기에는 언제나

창의성사업성이 함께 존재한다.  

이런 현실을 감안한다면

작가들

예술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작가들에게 이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단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작가가 되려면 

예술뿐만 아니라 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쓰기와 같이 창의적인 일에서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세상이 뿜어내는 각종 소음 공해와,

집단 간의 마찰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발상을 억압하는

주변 환경의 제약으로부터도

일정 부분 거리를 둔 채 작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생활고에 시달렸던 

영국 수필가

찰스 램(Charles Lamb, 1775~1834)은

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는 우리에게

시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돈은 주조된 자유다(Money is coined liberty).

그래서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돈은 열 배나 더 소중한 것이다

 

작가들에게

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자유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렇지만, 

은 어디까지나

글쓰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절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글쓰기주인이고,

은 그저 하인 역할에 그쳐야 한다.

 

독일의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Karl Mark, 1818~1883)

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작가는 글을 쓰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결코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며 살아서는 안 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작가가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글쓰기 라는

작가 본연의 목적도 상실하지 않는,

그야말로 균형잡힌 인식아닌가?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애거서 크리스티

(Dame Agatha Christie, 1890~1976), 

스티븐 킹

(Stephen Edwin King, 1947~), 

조앤 K. 롤링

(Joanne Kathleen Rowling, 1965~) 처럼

균형잡힌 인식을 유지하면서도, 

글쓰기엄청난 수입을 거둔

작가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www.youtube.com/channel/UCzCJYr4wnU8M65fB4ulXaW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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