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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을 욕망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그의 주저인 『형이상학』
위의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지(知)에 대한 욕구는 생득적인 것 같다.

인간은 단순히
물질대사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정보대사에 의해 
광활한 지적 세계에 대한 탐구를 갈망해 왔다.  

섭식을 통해 
인간의 육체가 유지 · 진화되어 온 것처럼
독서를 통해 
인간의 지식은 온축 · 진보되어 온 것이다.   

독서에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지적 생활형 독서
출력을 전제로 한 지적 생산형 독서가 있다. 

전자
출력의 목적은 불분명하지만,
읽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목적으로서의 독서인 데 반해,

후자
출력의 목적이 분명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독서이다.

지적 생활형 독서
영국의 예술 평론가인 
필립 길버트 해머튼(1834~1894) 
그의 저서 

『지적 즐거움』 (베이직북스, 2008)에서 
'지적인 생활이란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매하고 순수한 진리를 열렬히 추구해 가는 것' 이라고 

말한 것처럼,
과정지향적이다. 

반면에,
지적 생산형 독서
피터 드러커(1909~2005)
그의 저서 피터 드러커의 자기경영노트』 (한국경제신문, 2003)에서 
'지식 근로자의 과업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결과지향적이다. 

이와 같은 독서 목적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독서 방법의 차이로 귀결된다.

지적 생활형 독서
초점
무엇을 위한다는 목적이 아닌
읽는 행위라는 과정 그 자체에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독자가 책을 즐길 수만 있다면,
다독이나 소독, 광독이나 협독,
속독이나 지독, 조독이나 정독
그 어느 것이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와는 달리,
지적 생산형 독서의 경우에는
초점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기 때문에,
독서의 방법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양자를 효과와 효율의 측면,
즉 방향성과 속력의 측면에서 비교해 보면,
지적 생산형 독서가
지적 생활형 독서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다. 

지적 생산형 독서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에
방향 설정이 보다 명확하고,
마감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속력 향상이 보다 용이하다.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는 경우라면
하루에 기껏해야 한 권, 
많아야 두 권 정도의 독서에 그치겠지만,
특정 주제를 조사하는 경우라면
하루에 열 권, 
심지어 스무 권을 훑어보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에서는 훑어 본다는 말이 중요한데,
이것은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신속하게 필요한 부분만을 찾아내 읽고,
그 이외의 불필요한 부분은 건너뛰는 
발췌독에 가깝다.

그렇다면  
필요한 부분과 불필요한 부분을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합목적성이다. 
다시말해,
자신의 목적 달성에 반드시 필요한 정보는 취하고,
불필요한 정보는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다. 

목적만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면,
목차, 표제, 색인 등만 활용해도 
단시간 내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읽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구글의 철학이나 업무 방식에 관한 
조사를 한다고 가정할 경우,
구와바라 데루야 
『구글을 움직이는 10가지 황금률』 (윌컴퍼니, 2011),
마키노 다케후미 
『구글의 철학』 (미래의창, 2015),
에릭 슈미트 · 조너선 로젠버그 · 앨런 이글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 (김영사, 2014),
버나드 지라드 
『구글은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 (예문, 2010) 등
저서명을 기준으로 
목적에 부합하는 책을 찾은 다음,
목차를 펼쳐 
구글의 철학과 업무 방식에 관한 부분을 파악한 후,
해당 부분만을 철저하게 읽는 방식이다. 
   
달성해야 할 
분명한 지적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가
지적 생산형 독서의 핵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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