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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현실이라는 현미경을 통해서

글쓰기를 바라보면 어떨까?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글쓰기는 왜 그렇게 중요한 걸까?

현실에서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는 

의사소통(communication) 이라는

한 단어로 집약할 수 있다.

 

의사소통

자기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내적 소통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공유하고 전달하는 외적 소통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내적 소통

자기 자신을 지키고 치유하는 것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당신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에서

염원했던 것과 같은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정직이 급류처럼 흘러내리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당신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

부조리가 만연하고,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불합리가 범람하며,

불평등이 고착화되어 있고,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불완전한 세계다.  

 

조리와 정의의 화장을 지우면,    

부조리와 부정부패가 추한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적법절차의 계단으로   

가뿐 숨을 몰아쉬며 느릿느릿 걸어 올라가는 사람은

금권만능의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사람에게

금세 추월을 허용한다.

 

또한,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는 마천루가

도심을 빼곡히 채우면 채울수록 

빈곤의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지고, 

자유의 해가 지면 

이내 속박의 밤이 고개를 치켜드는, 

그런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다. 

(물론,

나는 이 세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진흙 속에서도 연꽃은 피고,

황폐한 사막이라도 

그 안 어딘가에는 오아시스가 숨어 있기 마련이니까.)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당신에게 

당신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한 시련과 극심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때로는

무분별한 자극을 가해 당신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고,

때로는

악의적인 중상과 비방으로 명예를 실추시킬 것이며,  

어떤 때는 노골적인 면박을,   

또 어떤 때는 무자비한 비난을 퍼부어

용기를 잃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에서

끊임없이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방황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다.

어쩌면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고,

자조섞인 푸념을 늘어놓으며,  

남은 인생을 체념으로 일관하게 될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

당신을 조금씩 파괴하려 들 것이다.

당신의 상사는 아마도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서 

당신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리더인

멀티플라이어(multiplier)와는

거리가 먼 사람일 공산이 크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당하게 당신을 억누르고,

아이디어를 질식시키며,

지적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막아버리는 리더인

디미니셔(diminisher)에 더 가까울 것이다.  

(멀티플라이어디미니셔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리즈 와이즈먼그렉 맥커운이 함께 쓴

『멀티플라이어』를 참고하라.) 

 

어쩌면,

당신의 동료들도 

동료애를 가지고 

당신이 저지른 실수를 너그럽게 포용하기보다는 

당신을 그저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부하 직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가정만은 무풍지대일 거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정도 결코 안전지대는 아니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그로 인한 간섭은

때로는 당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 것이다.

형제 자매 간에도 서로를 비교하는 일이 빈번할 것이고,

부부 사이에서도  

의견 충돌로 인해 종종 갈등과 불화를 겪게 될 것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고, 

은 실패투성이고,

인간 관계도 갈등이 팽배한,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놓인 상황에서

당신은 

세상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 상처입은 당신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신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위험천만한 세상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지킬 수단이 필요하다.  

이럴 때,

글쓰기는 당신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20세기 SF 문학의 입지를

주류 문학의 위상으로 끌어올린

미국의 미스터리 소설작가

레이 브래드버리

(Ray Douglas Bradbury, 1920~2012)

『화성으로 날아간 작가』에서

이렇게 썼다. 

 

글쓰기에 흠뻑 취해 있어야만

현실이 우리를 파괴할 수 없다.

..그리하여 어항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헐떡거리며 맥없이 쓰러지지 않게 해준다.”

 

그렇다. 

현실이 당신을 파괴하려고 들 때면, 

글쓰기

어김없이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세상이 온갖 불협화음과 소음 공해를 일으켜 

당신의 귀를 거슬리게 한다면

글쓰기는 기꺼이 소음벽이 되어줄 것이고,

세상이 각종 바이러스를 퍼뜨려

당신을 감염시키려고 한다면 

글쓰기는

바이러스를 억제하기 위해

당신에게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할 것이다.

또, 면역 증진제를 투여해서 

당신의 면역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할 것이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줄리아 카메론(Julia Cameron, 1948~)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어떤 것을 글로 쓰면

상처받는 일이 조금 줄어들게 됨을 느낀다.” 

 

그녀는 또,

글 쓰는 삶

외로움의 방패막이 구실을 해주고,

외로움을 치료해주는 연고나 마찬가지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때로는,

글쓰기가 당신에게

외부의 재난이나 번거로움이 미치지 않는 무풍지대

또는  

고통이나 위험 등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할 것이다.

 

한때,

영국 작가

서머싯 몸

(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은 

책은 인생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피난처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글쓰기도 이와 마찬가지다.

 

당신이 인생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불행에 빠져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면 

글쓰기는

인생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당신을 지켜주는 피난처가 되어줄 것이다.

 

기분이 언짢은가? 

그럴 때는 을 써라.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뿐만 아니다.

글쓰기는

당신의 감정에 균형을 잡아 주고,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혹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가? 

그럴 때는 글을 써라.

글을 쓰는 동안 

당신은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 

앞으로 당신이 가야할 곳은 어디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직면한 현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렸던 

목적의식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뜻을 잃고, 

슬퍼하고 탄식하며,

절망과 좌절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럴 때는 글을 써라.

 

은 당신이

역경속에서 새롭게 태어나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을 수 있도록,

또 현실에서 균형 감각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잠깐.

이쯤에서,

당신이 마음 속에 품고 있을,

그리고 나 역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을 해소하고 가자.  

 

당신도 알다시피,

글쓰기란 단지

타자기를 두드려서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그런 행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글쓰기

왜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는 걸까?             

 

우리는

트레버 실버스타(Trevor Silvester)

『워드위빙WordWeaving

:The Science of Suggestion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결코 현실을 알지 못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결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왜냐고? 

흙탕물이 우리의 을 뿌옇게 흐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마치 뿌연 흙탕물과 같아서,  

그 물이 가라앉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진실을 깊이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럼,

여기서 흙탕물이 뭘까?

편견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색안경을 낀 채 과장하거나 축소해서 바라보는,  

심지어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기까지 하는

지독한 편견이다.

 

그럼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글쓰기?

그게,

그것만 끼면 

세상의 모든 은 가라앉고 깨끗한 물만 볼 수 있는 

마법의 안경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만 복용하면 나쁜 감정들이 순식간에 눈녹듯 사라지는

초강력 진정제라도 되는 겁니까?

 

글쓰기는

비록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마법의 안경이나 초강력 진정제는 아니지만,

당신이 가진 편견을 극복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이유는 간단하다.

거리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오싱젠(高行健, 1940~) 

2002년 6월 8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제41회 세계정상회의에서 황금공로상을 수상했는데,

기념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혜의 안목은 거리두기에서 옵니다. 

사람과 사건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더 뚜렷하게 볼 수 있고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 안에 있을 때 

당신은 참여자가 된다.

이때 

당신은 세상, 사람, 사건을

주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마치 축구장 안에서 경기하는 한 명의 선수처럼 말이다.   

 

반면,

당신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면 

당신은 세상과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찰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흡사

축구장 밖에서 유심히 경기를 지켜보며

치밀하게 분석하는 코치와 같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글쓰기고독침묵을 필요로 한다.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의 신성한 공간에 앉아서, 

(지금 나는

지하 2층의 작은 공간에서

-말이 지하 2층이지 실제로는 지하 4층 깊이-

외부의 간섭과 방해로부터 벗어나 이 글을 쓰고 있다.

물론 불만은 없다.

에어컨도 있고 공기청정기도 있으니까.)

입을 굳게 다문 채 

마음의 혀로 내뱉은

으로 옮기는 작업이다. 

 

물론,           

고독감을 느낄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독립적으로, 또 자유롭게  사고하는 과정에서 

자아의 한계에서 벗어나   

세상자신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세상자기자신 사이에 적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당신만의 적정거리에 대해 생각해보아라.

그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만의 신성한 공간을 유토피아로 만들어보아라.

 

현대인들에게 글쓰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치유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

『시학』에서

문학을 비롯한 예술카타르시스

즉, 마음을 정화하는 정신적 치료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어김없이 자아의 덫에 걸리게 되고 만다. 

자기 생각에 빠지면 

편견망상에 사로잡혀서   

자아를 성찰할 수도,

다른 사람과 세상을

냉철한 눈으로 관조할 수도 없게 된다.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하거나 

실연의 아픔으로 힘든 나날을 보낼 때, 

자신이 큰 병에 걸리거나 

가족이나 지인이 죽음에 맞닥뜨릴 때 

냉정하게 대처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을 쓰면 

지혜의 눈을 가질 수 있다.

자아의 한계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겨 내려놓을줄 알게 되면서,  

결국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2001년,

미국 작가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

(Terry Tempest Williams, 1955~)도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의 평안을 느끼기 위해, 

또 자유를 누리기 위해 글을 썼다.

 

그녀는

『노던라이츠』(Northern Lights)에 실린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과

화해하기 위해 글을 쓴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 

(Emily Elizabeth Dickinson, 1830~1886)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를 썼다.

 

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 

(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는   

글을 쓰는 동안에는

노이로제와 같은 질병을 떨쳐버릴 수 있어서 글을 썼고,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컷

(Louisa May Alcott, 1832~1888)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글을 썼다.

 

글을 쓰는 행위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거나,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왜 그럴까?  

정신분석학자들

다년간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말하자면, 

언어정서적 경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난생처음 도서관이라는 곳을 갔을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도서관에는 책이 왜 이리도 많은 걸까?" 

사실,

그때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당신과 나 같은 독자들

저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얻지만,

그 많은 책을 쓴 저자들

책을 쓰는 동안 스스로 상처를 치유했다는 사실을.

 

물론,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글쓰기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치유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당신도 글을 써라.

글을 쓰면 당신의 상처가 아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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