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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기술과 고도화된 물질 문명이
인간 사회에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의
물질적 풍요로움과 편의성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도리어 인간은
풍요와 편의를 얻는 대가로, 
과도한 긴장과 불안이라는
스트레스의 노예로 전락해, 
만성 피로 증후군에 시달리며, 
이에 대해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직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귀촌이나 귀농을 결심하기도 하며,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이민을 감행하기도 한다. 

하나의 동일한 사안에 대해 
사람들이 대응하는 방식은
개개인의 환경이나 성격, 
취향이나 가치관의 차이 만큼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염오된 세계에 내주하는 인간이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은, 
눈 앞의 현실을 거부한 채 
또 다른 세계로 탈주하는,
이른바 외부 세계를 변경하는 방식과 
직면한 현실을 인정한 채
내면 세계를 재구축하는,
두 가지의 방식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고유한 관점과 각도에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양자의 우열에 대해 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누군가가
"당신은 이와 같은 상황을
어떤 견지에서 바라보는가?" 라고 묻는다면,
항상 동일한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십중팔구는 
후자의 방식을 염두에 둔 결정을 한다고 답할 것이다. 

재진이진, 
티끌에 있으면서 티끌을 여의고, 
재세출세,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 골자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응어제신, 
모든 사물에 응하되,
불의물루,
물루가 되지 않는다(물건에 얽히지 않는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어지고,
붉은 빛에 가까이 하면 반드시 붉어진다는 것은
상당부분 사실에 가깝지만, 
내가 지향하는 바는 
진흙 속에 내주해도 
결코 흙빛에 잠식당하지 않고 
종국에는 개화하는 연꽃이나,
열사의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가 되는데 있다. 

삼라만상에서 배태되어
세간을 부유하는 
일개 분진의 무리에 가담했지만,
분진 속에 머물되,
분진으로 남지 않는 삶을 살아가겠다. 
티끌에 있으면서도 티끌을 여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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