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하얀 캔버스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인생이 그림을 그리는 것과 일면 비슷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것도 없는 여백에 무언가를 그리는 건 비슷하다. 그런데... 인생을 그리는 도구는 연필이 아니라서 지우개로 지울 수 없다는 점이 다르다. 아니, 어쩌면 인생에는 지우개가 없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서산 대사의 시가 생각난다.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에는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남들이 저지른 악행이 모두 나에게 모이고, 모든 선의 과보는 남들에게 가기를 바란다.” 나가르주나
덕이 없는 학문이 천박한 지적 기술에 불과한 것처럼, 교양이 없는 전문지식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총체상을 조감하는 역량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이 개별상에만 초점을 맞춰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은 후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인격과 덕을 탁마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세상에 나가서 중요한 판단을 해야할 때 그 기준을 제시할 교양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학생을 절름발이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한 인간이 학교 교육에 초점을 맞춰서 거기에서 배운 잣대로 인생을 살아가다가는 자칫 정신적인 불구자로 전락해,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국가도, 기업도, 학교도, 심지어 가정도 그런 교육을 다 제공하지는 못하기에, 인..
종교가 강력한 힘을 가진 이유는 지식이 끝나는 지점에서 바로 그것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상상력도 종교와 유사하다. 지식이 부족해서 지적 낭떠러지에 이르면, 인간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싸맨 채 해답을 찾으려 애쓰거나 놀이 하듯이 공상에 빠져야 한다. 웅덩이를 흙으로 덮으면 사람이 그 위로 걸어갈 수 있는 것처럼, 더 이상 땅이 이어지지 않고 눈 앞에 절벽만 보인다면 생각으로 그 공극을 메워서 허공 위를 걸어가야 한다. 현자들은 그걸 일러서 백척간두진일보 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식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한계도 없다. 마음과 머리를 비워두고 상상할 여유를 가지자.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죽기 전의 마지막 모습을 연결하는 것이 이미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져버렸다. 가령, 지금 하는 일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5분 후와 50년 후를 연결해보는 내 그릇된 공상이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과거와 미래 라는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보이지 않는 상상의 끈으로 연결해 본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자극이 되고,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촉매로 작용한다. 벌레의 눈으로 나무를 관찰하는 한편, 새의 눈으로 숲을 조망할 수만 있다면, 흥미롭지 않겠는가? 5분 후와 50년 후를 동시에 생각하자. 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재는 ..
“마천루는 땅이 남아도는 자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 땅값이 엄청나게 비싼 코딱지만한 토지에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빌딩을 지을 수 있을까 고민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창조력 컨설턴트 로저 본 외흐가 에서 한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온통 지뢰밭투성이고, 발에 채이는 걸림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그 걸림돌이 없다고 해서, 보다 더 유리한 조건에서 일한다고 해서 인간에게 잠재된 창의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지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걸림돌이 있으면, 그 돌을 딛고 디딤돌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땅 위를 온전히 걸을 수 있는 것도 마찰력이 있기 때문아닌가? 사실, 우리를 제약하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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