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히라이 쇼슈의 《좌선을 권하다》 라는 책의 한 부분인 을 읽는 도중에,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어린 시절에 구슬치기 놀이를 하던 장면을 상기했다. 그러다 기억은 이내 또 다른 기억으로 전이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책상 위에 올려 놓았던 쇠구슬이 제멋대로 낙하해 바닥에 있던 나무에 떨어져 나무의 한 쪽 끝부분이 움푹 파이고 말았던, 아찔했던 장면이었다. 높은 곳에 있는 쇠구슬이 낮은 곳에 있는 나무 위로 떨어지면, 나무가 움푹 파인다. 도대체 왜 그럴까? 나는 과학자가 아니니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이야기를 늘어 놓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관찰을 토대로 한 직관을 언어로 번역해 보자면, 나무가 쇠구슬을 받아들일 정도로 유연하지..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애증의 감정을 응고해 둔 채, 타자의 시선으로 그저 응망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격렬하게 분투 정진하는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우선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흰색 가운을 걸치고, 현미경과 망원경이라는 합리성을 무기 삼아, 세상에 기여하는 모습이 보인다. 다음은 정치인이 국회에서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법에서 기인하는 권력이라는 의지를 바탕으로, 중대 현안을 결정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다음은 소설가와 철학자가 작업실과 연구실에서 다소 자유로운 옷차림으로, 지식과 지성을 탁마하는 과정을 목도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인이 사찰과 사원, 교회에서 가사와 장삼, 사제복 등을 걸치고, 신도와 신자들 앞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광경을 본다. 과학자는 합리성으로, 정치인은 의지로, 소설가와 철학..
타인에게 자신의 탁월한 역량을 증명하는데 인생의 상당 부분을 허비한다면, 정작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미처 완수하지 못한 채 사멸에 이르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게 된다. 세상, 사회, 그리고 대중은, 한 인간에게 지적, 정치적, 사회적 허영심을 부추겨 증명하는 인간이 될 것을 종용함으로써, 그들의 내심에 쉽사리 소거되지 않을 노예 낙인을 찍는다. 그 결과 다수의 사람들은 사회적 불도장의 가혹한 멍에로부터 탈각하지 못한 채, 궤탄한 최후일각에 직면하고 만다. 인간은 그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삶에는 비루하고, 비천하며, 부박하기까지 한 인격의 도랑 만이 형성될 뿐이다. 그저 소박하고, 담박한 내면의 진실을 위해, 사회와 대중이 제각한 낙인을 지우고 소요하기..
에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말한다. 사람의 진면목은 치세가 아닌 난세, 평상시가 아닌 유사시, 순경이 아닌 역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를 기업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불황이 닥치면 건전하고 강한 기업과 불건전하고 부실한 기업의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만다. 호황기에는 편서풍의 도움을 받아 강을 가로지르던 돛단배와 자력으로 운행하는 모터보트를 전연 분간할 수 없지만, 불황기에는 진실의 눈을 가리던 암막과도 같은 편서풍은 사멸된 채, 돛단배와 모터보트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 진위가 명명백백하게 가려진다. 거짓과 진실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을 펼칠 이유는 없다. 겨울이 되면 누가 돛단배고, 누가 모터보..
나는 꽃길 보다는 가시밭길이 좋다. 물론 꽃길이 편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버스나 지하철에 승차해 목적지까지 여유롭게 갈 수 있지 않은가. 때론 창 밖에 보이는 풍광들을 보며 때론 음악을 감상하며 때론 세상을 관조하며 느긋함을 만끽할 수도 있다. 하지만 꽃길의 안온한 단상에만 젖어 있으면 배우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한 여름에 그을릴 일도 한 겨울에 칼 바람을 맞을 일도 없을 것이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고생 없이 무탈하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성장할 기회를 박탈 당한다는 말이 아닌가. 지금은 고인이 된 내가 존경하는 한 철학자는 살아 생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의 두 갈래 길이 있으면 항상 어려운 길을 선택하도록 하거라. 그 길이 옳은 길일 가능성이 ..
나는 물질에 대한 동경이 없다. 사람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름을 얻고 싶지도 않고, 권능을 구하고 싶지도 않으며, 지식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십대 10년, 삼십대 4년 동안은 그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내린 작은 결론은 삶의 관점에서 삶을 향유하지 않고,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경작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죽는다면 돈과 명예가 필요할 리 없지 않은가.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내 삶은 이걸로 충분해" 라는 자족 뿐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오직 본인 만이 감지할 수 있는 감정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 하나 뿐이다. 삶은 짧고 죽음은 길다. 삶은 장거리 주행을 위해 중간에 경유하는 휴게소이자, ..
나는 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했다. 내 머릿 속에는 항상 언어가 아닌 그림이 있었고, 그림을 언어로 변경하는 작업은 생각 만큼 쉽지 않았다. 머릿 속에 있는 시각 언어를 문자 언어로 변경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했고, 간신히 우리말 어순에 맞춰 말을 해도 남들이 보기에는 말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렸다. 나는 지금도 말하는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내 사고 구조가 부분을 분석하는 문자 언어 보다는 전체를 직관하는 시각 언어에 가깝다는 사실 말이다. 언어를 예로 들면 분석적인 특징을 가진 인도유럽 언어 보다는 직관적인 성향을 보이는 한문이나 우랄 알타이어 계통에 가까운 것이다. 십수 년간 논리학과 철학을 공부했지만 기질이 여전히 예술가에 더 가..
10대에는 야망을 가졌다. 야망이란 한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목표를 살아 생전에 달성하는 것이다. 20대에는 꿈을 꿨다. 꿈이란 한 개인이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목표를 죽기 전에 성취하는 것이다. 30대인 지금은 뜻을 품고 있다. 뜻이란 나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목표를 비록 살아 생전에는 이루지 못하더라도, 후대의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중요한 일은 불과 몇 십년 만에 완성할 수 없다. 수 백년, 수 천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일본 파나소닉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전 회장이 300년 앞을 내다보고 경영을 했듯이, 나는 300년 이상을 내다보고 나의 일을 하려고 한다. 내가 심는 이 사과 나무가 꼭 나의 입 속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누구의 입속으로 들어갈지는..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선생은 제자에게 외면 당하지 않고,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기업은 고객에게 버림 받지 않으며,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지도자는 국민에게 비난 받지 않는다. 제자는 스승의 역량 보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중요시 하고, 고객은 기업의 기술 보다 자신들을 위하는 진정성을 중시하며, 국민들은 지도자의 카리스마 보다 자신들을 위한 헌신을 우선시 한다.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마음을 얻는 것이고,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 진정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세상에 기여하겠다는 순수한 열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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